홀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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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홀(Hole)은 1989년 코트니 러브와 에릭 얼랜드슨을 중심으로 결성된 밴드이다. 1991년 데뷔 앨범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를 시작으로, 1994년 《라이브 스루 디스》, 1998년 《셀러브리티 스킨》, 2010년 《노바디스 도터》를 발매했다. 펑크 록과 얼터너티브 록을 기반으로, 러브의 페미니즘적 가사와 파격적인 무대 매너로 주목받았다. 1990년대 후반 활동을 중단했다가 2009년 재결성했으나, 2010년대 초 다시 해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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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 결성 (1989-1991) ==
홀(Hole)은 1989년 여름 코트니 러브가 《더 리사이클러(The Recycler)》에 게재한 광고에 에릭 얼랜드슨이 응답하면서 결성되었다.[2] 광고에는 "밴드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제가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빅 블랙, 소닉 유스, 그리고 플릿우드 맥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2] 얼랜드슨은 러브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그녀를 보고 '맙소사, 이게 뭐하는 짓이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저를 붙잡고 말을 시작했는데, '당신이 바로 적임자라는 걸 알아요'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아직 입도 벌리지 않았었죠."라고 말했다.[2] 러브는 얼랜드슨에게 "서스턴 무어 같은 면이 있었다"고 말했다.[2] 2012년 출간된 그의 책 《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Kurt)》에서 얼랜드슨은 그와 러브가 밴드 활동 첫 해 동안 성관계를 가졌다고 밝혔다.[3]
러브는 이전 페스 노 모어의 멤버로 잠시 활동했고,[4] 밴드 결성 시도 실패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알렉스 콕스(Alex Cox) 감독의 영화(《시드와 낸시》, 《스트레이트 투 헬》)에서 배우로 활동했다.[5]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를 졸업한 얼랜드슨은 러브를 만났을 당시 캐피톨 레코드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었다.[6]
러브는 밴드 이름을 스윗 베이비 크리스탈 파워드 바이 갓(Sweet Baby Crystal Powered by God)으로 짓고 싶었지만, 대신 홀(Hole)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7] 밴드 이름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에 나오는 대사와, 어머니와 나눈 대화에서 영감을 받았다.[1][8] 러브는 또한 음부를 암시하는 밴드 이름의 성적 의미도 인정했다.[1]
밴드가 완전히 결성되기 전 몇 달 동안, 러브와 에를랜드슨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빌려준 할리우드의 연습실에서 작곡과 녹음을 했다.[9] 낮에는 러브가 스트리퍼로 일하며 밴드를 지원하고 라이브 공연을 위한 앰프와 백라인을 구입했다.[10] 홀의 첫 공식 연습은 할리우드 포트리스 스튜디오에서 러브, 에를랜드슨, 그리고 베이시스트 리사 로버츠와 함께 이루어졌다.[11] 이후 롱비치의 콘서트에서 드러머 캐롤라인 루를 만났고,[8] 세 번째 기타리스트 마이크 가이스브레히트를 영입했다. 홀의 첫 공연은 1989년 10월 할리우드의 작은 바인 Raji's에서 열렸다.[12] 1990년 초, 가이스브레히트와 로버츠는 모두 밴드를 떠났고, 이후 베이시스트 질 에머리가 영입되었다.[11]
홀은 1990년 4월 노 웨이브의 영향을 받은 데뷔 싱글 "Retard Girl"을 발매했고,[13] 1991년에는 심파시 포 더 레코드 인더스트리와 섭 팝을 통해 각각 "Dicknail"을 발매했다. 1991년, 밴드는 데뷔 앨범 발매를 위해 캐롤라인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고, 러브는 소닉 유스의 킴 고든에게 앨범 프로듀싱을 요청했다.[14][15] 고든은 밴드의 싱글에 감명을 받아 검볼의 돈 플레밍의 도움을 받아 앨범 프로듀싱에 동의했다.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라는 제목의 이 앨범은 1991년 9월 7일, 버진 레코드 산하 인디 레이블인 캐롤라인 레코드에서 발매되었으며 "시끄럽고, 추하고, 의도적으로 충격적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16] ''Spin''의 "올해 최고의 앨범 20선" 목록에 선정되었고,[17] 뉴욕의 ''빌리지 보이스''에서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었고,[18] 영국 앨범 차트에서 59위에 올랐다.[18] 이 앨범은 싱글 "Teenage Whore"를 탄생시켰고, 이 싱글은 영국 인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19] 또한 밴드의 데뷔 뮤직비디오 "Garbadge Man"도 이 앨범에 수록되었다.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는 펑크 록과 슬러지 메탈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노이즈와 피드백, 혼란스러운 기타 리프, 대조적인 템포, 충격적인 가사, 그리고 속삭임부터 격렬한 비명까지 다양한 러브의 보컬을 특징으로 했다.[20] 밴드는 1991년 가을 Mudhoney를 지원하며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22] 또한 1991년 7월부터 12월까지 미국에서 간헐적으로 투어를 진행하며,더 스매싱 펌킨스의 오프닝 무대를 맡기도 했다.[22]
1991년 중반, 밴드는 메이저 레이블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마돈나와 음악 임원 프레디 드먼이 설립한 워너 뮤직 그룹의 자회사인 매버릭이 먼저 접근했으나 러브는 관심이 없었다.[23] 10대부터 음악 활동을 하며, 페이스 노 모어의 보컬을 잠시 맡는 등 뮤지션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코트니 러브가 198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했다. 2년 후인 1991년 9월 7일, 1집 앨범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를 버진 레코드 산하 인디 레이블인 캐롤라인 레코드에서 발매했다.
== 초기 활동과 인디에서의 성공 (1991-1992) ==
밴드가 완전히 결성되기 전 몇 달 동안, 코트니 러브와 에릭 얼랜드슨은 할리우드의 연습실에서 작곡과 녹음을 했다. 이 연습실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빌려준 것이었다.[9] 러브는 낮에는 스트리퍼로 일하며 밴드를 지원하고 앰프와 백라인을 구입했다.[10] 홀의 첫 공식 연습은 할리우드 포트리스 스튜디오에서 러브, 에를랜드슨, 그리고 베이시스트 리사 로버츠와 함께 이루어졌다. 에를랜드슨에 따르면, "두 명의 여자가 완전히 괴상한 차림으로 나타나더니, 우리가 장비를 설치하자 "좋아, 그냥 무언가를 연주하기 시작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연주를 시작하자 그들은 2~3시간 동안 최대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습니다. 미친 가사와 비명이었죠. 저는 속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정말 빨리 도망칠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코트니의 목소리와 가사에서 무언가를 들었습니다."[11] 처음에는 드러머가 없었지만, 러브는 롱비치의 Gwar와 L7 콘서트에서 드러머 캐롤라인 루를 만났다.[8] 이후 밴드는 세 번째 기타리스트 마이크 가이스브레히트를 영입했다. 홀의 첫 공연은 1989년 10월 할리우드의 작은 바인 Raji's에서 열렸다.[12] 1990년 초, 가이스브레히트와 로버츠는 모두 밴드를 떠났고, 이후 베이시스트 질 에머리가 영입되었다. 캐롤라인 루에 따르면, 러브는 로버츠가 롱비치의 한 클럽 주인(조직폭력배 에디 내쉬의 아내)에게 클럽이 공연료를 지불하지 않자 드라이버로 위협한 후 해고했다.[8]
홀은 1990년 4월 노 웨이브의 영향을 받은 데뷔 싱글 "Retard Girl"을 발매했고, 1991년에는 심파시 포 더 레코드 인더스트리와 섭 팝을 통해 각각 "Dicknail"을 발매했다. 디스크 자키 로드니 빙겐하이머에 따르면, 러브는 아침에 커피를 마시러 가던 선셋대로의 데니스에서 그를 자주 만나 "Retard Girl"을 자신의 방송국 KROQ-FM에서 방송하도록 설득했다.[13]
1991년, 밴드는 데뷔 앨범 발매를 위해 캐롤라인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고, 러브는 소닉 유스의 킴 고든에게 앨범 프로듀싱을 요청했다.[14][15] 그녀는 편지, 헬로 키티 머리핀, 그리고 밴드의 초기 싱글을 보내며 밴드가 고든의 작품을 매우 존경하고 "SST 레코드 음반의 프로덕션" (소닉 유스의 앨범 ''Sister'' 또는 ''EVOL'' 중 하나를 가리킴)을 높이 평가한다고 언급했다. 고든은 밴드의 싱글에 감명을 받아 검볼의 돈 플레밍의 도움을 받아 앨범 프로듀싱에 동의했다. 1991년 9월 7일, 버진 레코드 산하 인디 레이블인 캐롤라인 레코드에서 발매된 첫 정규 앨범 《Pretty on the Inside》는 "시끄럽고, 추하고, 의도적으로 충격적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16] ''Spin''의 "올해 최고의 앨범 20선" 목록에 선정되었다.[17] 또한 뉴욕의 ''빌리지 보이스''에서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었고, 영국 앨범 차트에서 59위에 올랐다.[18] 이 앨범은 싱글 "Teenage Whore"를 탄생시켰고, 이 싱글은 영국 인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19] 또한 밴드의 데뷔 뮤직비디오 "Garbadge Man"도 이 앨범에 수록되었다. 코트니 자신이 매춘부였던 경험 등을 적나라하게 노래한 이 앨범으로 유럽과 미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음악적, 가사적으로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는 거칠었고 펑크 록과 슬러지 메탈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노이즈와 피드백, 혼란스러운 기타 리프, 대조적인 템포, 충격적인 가사, 그리고 속삭임부터 격렬한 비명까지 다양한 러브의 보컬을 특징으로 했다.[20] 후년에 러브는 비평가들의 찬사와 궁극적인 컬트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을 "들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21] 밴드는 유럽 투어를 시작했으며, Mudhoney를 지원했다. 또한 1991년 7월부터 12월까지 미국에서 간헐적으로 투어를 진행하며 주로 하드록과 펑크 클럽, CBGB와 위스키 어 고 고에서 공연했고, 더 스매싱 펌킨스의 오프닝 무대를 맡기도 했다.[22]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밴드의 마지막 공연에 대한 기사에서 러브가 무대에서 릭커베커 기타의 헤드 스톡을 부쉈다고 언급했다.[22]
1991년 중반, 밴드는 메이저 레이블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마돈나와 음악 임원 프레디 드먼이 설립한 워너 뮤직 그룹의 자회사인 매버릭이 접근했지만 러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제가 코끼리를 타고 다니길 원할 겁니다. 그들은 제가 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저는 그저 시각적인 존재일 뿐입니다."[23] 또한 업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여성 아티스트 중 한 명과 밀접하게 관련된 레이블에서 스포트라이트를 공유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했다. 1992년 ''베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러브는 마돈나의 관심을 "흡혈귀가 최근 희생자에게 보이는 관심과 같은 것"이라고 묘사했다.[23] 이미 톱스타였던 커트와의 교제는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역설적으로 코트니와 홀 자체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 메이저 데뷔와 상업적 성공 (1992-1999) ==
1992년, 홀의 코트니 러브와 에릭 얼랜드슨은 두 번째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러브는 니르바나의 프런트맨 커트 코베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며, 밴드의 음악을 더욱 멜로디컬하고 절제된 록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베이시스트 엠마리가 탈퇴하고, 드러머 캐롤라인 루도 팀을 떠났다.[24] 1992년 4월, 패티 셰멜이 드러머로 영입되었지만, 밴드는 베이시스트 없이 활동하며 곡 작업을 이어갔다.[21]
홀은 1992년 후반, 게펜의 자회사인 DGC와 8장의 앨범 계약을 체결했다.[24] 1993년 봄, 밴드는 잭 엔디노와 함께 싱글 “뷰티풀 선”을 발표했으며, 크리스틴 파프가 새 베이시스트로 영입되었다.[25][26] 그 해 여름, 밴드는 영국 투어를 진행하며 메이저 데뷔 앨범 ''라이브 스루 디스''의 곡들을 연주했다. 이 앨범은 1993년 10월에 녹음되었다.
''라이브 스루 디스''는 1994년 4월 12일 발매되었는데, 이는 러브의 남편 커트 코베인이 사망한 지 일주일 후였다. ''라이브 스루 디스''는 "돌 파츠", "바이올렛", "미스 월드" 등 여러 싱글을 배출하며 멀티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스핀'' 매거진으로부터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는 등 비평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27][28] ''NME''는 이 앨범을 "도시적 허무주의와 열정적인 어리석은 생각들의 개인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쓰래시 팝 오페라"라고 평했고,[29] ''롤링 스톤''은 "테이프에 담긴 여성 저항의 가장 강력한 폭발일지도 모른다"고 했다.[30] 코베인이 앨범 작곡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밴드는 이를 부인했다.[24]
1994년 6월, 베이시스트 크리스틴 파프가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31] 밴드는 멜리사 오프 더 뮤어를 새 베이시스트로 영입하고, 8월 26일 리딩 페스티벌에서 월드 투어를 시작했다.[32] 밴드는 1994년 후반부터 1995년까지 전 세계 투어를 진행하며, KROQ 올모스트 어쿠스틱 크리스마스,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빅 데이 아웃, ''MTV 언플러그드'', 리딩 페스티벌, 롤라팔루자 등 다양한 무대에 섰다.[33][34]
투어 중 러브의 무대 매너는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고, 1995년 롤라팔루자 페스티벌에서는 캐슬린 하나와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36] 같은 해, 드러머 패티 셰멜은 커밍아웃하며 레즈비언임을 밝혔다.[2] 투어가 끝날 무렵, 밴드는 첫 번째 EP ''애스크 포 잇''을 발표했다.[38] 1996년, 홀은 영화 《까마귀: 천사의 도시》 사운드트랙을 위해 "골드 더스트 우먼(Gold Dust Woman)"을 커버했다. 1997년에는 초기 녹음 세션을 담은 ''더 퍼스트 세션''과 초기 싱글, B면 곡 등을 담은 컴필레이션 앨범 ''마이 바디, 더 핸드 그레네이드''를 발매했다.[40][41]
1997년, 홀은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 《셀러브리티 스킨》 작업에 착수했다. 10개월에 걸쳐 녹음된 이 앨범은 파워 팝 요소를 통합한 새로운 사운드를 선보였으며,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이 앨범 작업에 참여했다.[42] 코건은 앨범 작곡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주장했지만, 밴드는 이를 부인했다.[43][44]
앨범 녹음 중, 프로듀서 마이클 바인혼의 압력으로 드러머 패티 셰멜이 세션 드러머로 교체되었고, 셰멜은 밴드를 탈퇴했다.[45][46] 이후 밴드는 사만다 말로니를 투어 드러머로 고용했다.[46]
《셀러브리티 스킨》은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타이틀곡 "셀러브리티 스킨(Celebrity Skin)", "말리부(Malibu)", "어풀(Awful)" 등 성공적인 싱글을 배출했다.[47][48]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9위에 올랐고, "셀러브리티 스킨"은 밴드의 유일한 1위 싱글이 되었다.[50]
== 활동 중단과 해체 (1999-2002) ==
1998년 겨울부터 1999년 겨울까지 홀은 《셀러브리티 스킨》 홍보를 위해 마릴린 맨슨과 함께 뷰티풀 몬스터 투어에 참여했다.[52] 그러나 대부분의 팬들이 맨슨의 팬이었고, 수익 배분 문제와 제작비 차이로 인해 홀은 9회 공연 후 투어에서 하차했다.[52] 맨슨과 러브는 무대에서 서로를 조롱했고, 러브는 맨슨의 공연 중 성경을 찢는 행위를 비판했다.[13] 포틀랜드의 로즈 가든 아레나 공연에서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않자, 홀은 공식적으로 투어에서 하차했다.[53]
투어에서 하차한 후에도 홀은 계속 공연을 하고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출연했다.[54] 1999년 6월 17일, 스웨덴의 훌츠프레드 페스티벌에서 홀의 공연 중 19세 여성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55] 홀은 1999년 7월 14일, 밴쿠버의 썬더버드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공연을 했다.[56]
1999년 10월, 멜리사 오프 더 뮤어는 홀을 탈퇴하고 스매싱 펌킨스의 투어 베이시스트가 되었고,[57] 몇 달 후 사만다 멀로니도 탈퇴했다.[58] 밴드는 멤버를 충원하지 않고 사실상 활동 휴지 상태가 되었다. 홀의 마지막 발매작은 2000년 3월에 발매된 영화 《에니 기븐 선데이》의 싱글 "비 어 맨"이었다.[59]
밴드는 계약을 둘러싸고 유니버설 뮤직과 분쟁을 일으켰고, 이는 소송 문제로까지 번졌다. 코트니 러브는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과 니르바나의 권리 문제를 놓고도 충돌을 일으켰다.
2002년 5월, 코트니 러브와 에릭 얼랜드슨은 밴드 웹사이트에 해체를 공식 발표했다.[58][60] 해체 후, 얼랜드슨은 프로듀서 및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빈센트 갈로와 함께 RRIICCEE를 결성했다.[61] 러브는 솔로 활동을 시작하여 2004년 데뷔 앨범 《아메리카스 스윗하트》를 발매했다.[62] 멜리사 오프 더 모어 또한 솔로 활동을 시작하여 2004년 데뷔 앨범 《오프 더 모어》,[63] 2010년에는 두 번째 앨범 《아웃 오브 아워 마인즈》를 발매했다.[64]
== 재결성과 두 번째 해체 (2009-2016) ==
2009년 6월 17일, ''NME''는 코트니 러브가 기타리스트 미코 라킨과 함께 홀을 재결성하고 멜리사 오프 더 모어가 백업 보컬을 맡을 것이라고 보도했다.[66] 그러나 멜리사 오프 더 모어는 인터뷰에서 재결합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밝혔으며, 에릭 에를란드손은 ''스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러브 사이에 "계약"이 있어 자신의 참여 없이는 재결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68]
2010년 1월 1일, 홀은 새로운 웹사이트와 소셜 미디어 페이지를 개설했고, 2월에는 ''프라이데이 나이트 위드 조나단 로스''에 출연했다. 2010년 2월 17일, O2 셰퍼드 부시 엠파이어에서 리틀 피시의 지원을 받아 공연했다. 3월 16일, 10년 만의 첫 싱글 "Skinny Little Bitch"가 발매되어 빌보드 록 차트 29위, 얼터너티브 싱글 차트 21위에 올랐다.[69]
노바디스 도터''는 2010년 4월 26일 머큐리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어 평론가들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71] ''롤링 스톤''은 별 다섯 개 중 세 개를 주면서 러브의 보컬이 예전 같지 않지만 "적어도 그녀는 기억하고 있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라고 평했다.[72] 로버트 크리스토가우는 "A-"를 매기며 "새로운 펑크 분노가 필요"하며, 특히 45세 여성이 자신의 힘을 휘두르는 방법을 아는 것이 더 낫다고 언급했다.[74] 홀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북미, 유럽,[115] 러시아,[75] 브라질에서[76] 투어를 진행했다.
2011년 3월, 러브, 에를란드손, 패티 셰멜, 오프 더 모어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셰멜의 다큐멘터리 ''히트 소 하드: 패티 셰멜의 삶과 죽음 직전의 이야기'' 뉴욕 시사회에 13년 만에 함께 나타났다.[77] 셰멜은 함께 녹음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러브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78]
2011년 5월, "사만다"의 뮤직 비디오가 이스탄불에서 촬영되었으나 공식 발매되지는 않았다.[79] 2011년 9월, 스콧 립스가 스튜 피셔를 대신하여 드러머로 합류했다. 2012년 4월, 러브, 에를란드손, 오프 더 모어, 셰멜은 뉴욕 퍼블릭 어셈블리에서 ''히트 소 하드'' 다큐멘터리 애프터 파티에서 "미스 월드"와 와이퍼스의 "오버 더 에지"를 연주하며 1998년 이후 처음으로 함께 공연했다.[80][81]
2012년 12월 29일, 러브는 뉴욕에서 솔로 어쿠스틱 공연을 했고, 2013년 1월 선댄스 영화제에 출연했다.[82] 이후 라킨, 베이시스트 션 데일리, 립스를 백킹 밴드로 하여 솔로 활동을 이어갔다.[83]
2013년 12월 28일, 러브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에를란드손과 함께 찍은 사진을 게시하며 "2014년은 매우 흥미로운 해가 될 거예요"라고 언급했다.[84] 이는 에를란드손과의 화해와 2014년 재결합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85][86]
2014년 4월 2일, ''롤링 스톤''은 홀의 ''셀러브리티 스킨'' 시절 멤버들이 재결합했다고 보도했지만,[87] 러브는 곧 "결혼 이야기는 없다"라며 재결합이 불확실할 수 있음을 밝혔다.[88] 2014년 5월 1일, ''피치포크'' 인터뷰에서 러브는 ''노바디스 도터''를 홀의 앨범으로 발매한 것이 "실수"였다고 인정하며, 진정한 재결합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89][90][91]
2010년 재결합 당시, 원년 멤버는 코트니 러브뿐이었고, 에릭 에를란드손을 제외하면 모두 남성 멤버로 구성되었다. 에를란드손은 "나 없이 하는 홀의 재결합은 법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럼에도 홀은 2010년 4월 27일, 12년 만의 앨범 ''노바디스 도터''를 발매했다. 같은 해 여름 서머소닉을 통해 일본을 방문했다.
== 재결성 시도와 현재 (2019-현재) ==
2019년 10월, 홀은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서 리허설을 진행했다.[92] 그러나 이후 러브가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추가적인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93] 2020년 3월, 러브와 아우프 데르 마우르는 "Bans Off My Body" 행사에서 공연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취소되었다.[94]
2. 1. 결성 (1989-1991)
홀(Hole)은 1989년 여름 코트니 러브(Courtney Love)가 《더 리사이클러(The Recycler)》에 게재한 광고에 에릭 얼랜드슨(Eric Erlandson)이 응답하면서 결성되었다.[2] 광고에는 "밴드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제가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빅 블랙(Big Black), 소닉 유스(Sonic Youth), 그리고 플릿우드 맥(Fleetwood Mac)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2] 얼랜드슨은 러브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그녀를 보고 '맙소사, 이게 뭐하는 짓이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저를 붙잡고 말을 시작했는데, '당신이 바로 적임자라는 걸 알아요'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아직 입도 벌리지 않았었죠."라고 말했다.[2] 러브는 얼랜드슨에게 "서스턴 무어(Thurston Moore) 같은 면이 있었다"고 말했다.[2] 2012년 출간된 그의 책 《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Kurt)》에서 얼랜드슨은 그와 러브가 밴드 활동 첫 해 동안 성관계를 가졌다고 밝혔다.[3]
러브는 이전 페스 노 모어의 멤버로 잠시 활동했고,[4] 밴드 결성 시도 실패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알렉스 콕스(Alex Cox) 감독의 영화(《시드 앤 낸시(Sid and Nancy)》, 《스트레이트 투 헬(Straight to Hell)》)에서 배우로 활동했다.[5]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Loyola Marymount University)를 졸업한 얼랜드슨은 러브를 만났을 당시 캐피톨 레코드(Capitol Records)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었다.[6]
러브는 밴드 이름을 스윗 베이비 크리스탈 파워드 바이 갓(Sweet Baby Crystal Powered by God)으로 짓고 싶었지만, 대신 홀(Hole)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7] 밴드 이름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메데이아(Medea)》에 나오는 대사와, 어머니와 나눈 대화에서 영감을 받았다.[1][8] 러브는 또한 음부를 암시하는 밴드 이름의 성적 의미도 인정했다.[1]
밴드가 완전히 결성되기 전 몇 달 동안, 러브와 에를랜드슨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빌려준 할리우드의 연습실에서 작곡과 녹음을 했다.[9] 낮에는 러브가 스트리퍼로 일하며 밴드를 지원하고 라이브 공연을 위한 앰프와 백라인을 구입했다.[10] 홀의 첫 공식 연습은 할리우드 포트리스 스튜디오에서 러브, 에를랜드슨, 그리고 베이시스트 리사 로버츠와 함께 이루어졌다.[11] 이후 롱비치의 콘서트에서 드러머 캐롤라인 루를 만났고,[8] 세 번째 기타리스트 마이크 가이스브레히트를 영입했다. 홀의 첫 공연은 1989년 10월 할리우드의 작은 바인 Raji's에서 열렸다.[12] 1990년 초, 가이스브레히트와 로버츠는 모두 밴드를 떠났고, 이후 베이시스트 질 에머리가 영입되었다.[11]
홀은 1990년 4월 노 웨이브의 영향을 받은 데뷔 싱글 "Retard Girl"을 발매했고,[13] 1991년에는 심파시 포 더 레코드 인더스트리와 섭 팝을 통해 각각 "Dicknail"을 발매했다. 1991년, 밴드는 데뷔 앨범 발매를 위해 캐롤라인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고, 러브는 소닉 유스의 킴 고든에게 앨범 프로듀싱을 요청했다.[14][15] 고든은 밴드의 싱글에 감명을 받아 검볼의 돈 플레밍의 도움을 받아 앨범 프로듀싱에 동의했다.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라는 제목의 이 앨범은 1991년 9월 발매되어 "시끄럽고, 추하고, 의도적으로 충격적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16] ''Spin''의 "올해 최고의 앨범 20선" 목록에 선정되었고,[17] 뉴욕의 ''빌리지 보이스''에서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었고,[18] 영국 앨범 차트에서 59위에 올랐다.[18] 이 앨범은 싱글 "Teenage Whore"를 탄생시켰고, 이 싱글은 영국 인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19] 또한 밴드의 데뷔 뮤직비디오 "Garbadge Man"도 이 앨범에 수록되었다.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는 펑크 록과 슬러지 메탈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노이즈와 피드백, 혼란스러운 기타 리프, 대조적인 템포, 충격적인 가사, 그리고 속삭임부터 격렬한 비명까지 다양한 러브의 보컬을 특징으로 했다.[20] 밴드는 1991년 가을 Mudhoney를 지원하며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22] 또한 1991년 7월부터 12월까지 미국에서 간헐적으로 투어를 진행하며,더 스매싱 펌킨스의 오프닝 무대를 맡기도 했다.[22]
1991년 중반, 밴드는 메이저 레이블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마돈나와 음악 임원 프레디 드먼이 설립한 워너 뮤직 그룹의 자회사인 매버릭이 먼저 접근했으나 러브는 관심이 없었다.[23] 10대부터 음악 활동을 하며, 페이스 노 모어의 보컬을 잠시 맡는 등 뮤지션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코트니 러브가 198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했다. 2년 후인 1991년 9월 7일, 1집 앨범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Pretty on the Inside)를 버진 레코드 산하 인디 레이블인 캐롤라인 레코드에서 발매했다.
2. 2. 초기 활동과 인디에서의 성공 (1991-1992)
밴드가 완전히 결성되기 전 몇 달 동안, 코트니 러브와 에릭 에를랜드슨은 할리우드의 연습실에서 작곡과 녹음을 했다. 이 연습실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빌려준 것이었다.[9] 러브는 낮에는 스트리퍼로 일하며 밴드를 지원하고 앰프와 백라인을 구입했다.[10] 홀의 첫 공식 연습은 할리우드 포트리스 스튜디오에서 러브, 에를랜드슨, 그리고 베이시스트 리사 로버츠와 함께 이루어졌다. 에를랜드슨에 따르면, "두 명의 여자가 완전히 괴상한 차림으로 나타나더니, 우리가 장비를 설치하자 "좋아, 그냥 무언가를 연주하기 시작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연주를 시작하자 그들은 2~3시간 동안 최대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습니다. 미친 가사와 비명이었죠. 저는 속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정말 빨리 도망칠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코트니의 목소리와 가사에서 무언가를 들었습니다."[11] 처음에는 드러머가 없었지만, 러브는 롱비치의 Gwar와 L7 콘서트에서 드러머 캐롤라인 루를 만났다.[8] 이후 밴드는 세 번째 기타리스트 마이크 가이스브레히트를 영입했다. 홀의 첫 공연은 1989년 10월 할리우드의 작은 바인 Raji's에서 열렸다.[12] 1990년 초, 가이스브레히트와 로버츠는 모두 밴드를 떠났고, 이후 베이시스트 질 에머리가 영입되었다. 캐롤라인 루에 따르면, 러브는 로버츠가 롱비치의 한 클럽 주인(조직폭력배 에디 내쉬의 아내)에게 클럽이 공연료를 지불하지 않자 드라이버로 위협한 후 해고했다.[8]
홀은 1990년 4월 노 웨이브의 영향을 받은 데뷔 싱글 "Retard Girl"을 발매했고, 1991년에는 심파시 포 더 레코드 인더스트리와 섭 팝을 통해 각각 "Dicknail"을 발매했다. 디스크 자키 로드니 빙겐하이머에 따르면, 러브는 아침에 커피를 마시러 가던 선셋대로의 데니스에서 그를 자주 만나 "Retard Girl"을 자신의 방송국 KROQ-FM에서 방송하도록 설득했다.[13]
1991년, 밴드는 데뷔 앨범 발매를 위해 캐롤라인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고, 러브는 소닉 유스의 킴 고든에게 앨범 프로듀싱을 요청했다.[14][15] 그녀는 편지, 헬로 키티 머리핀, 그리고 밴드의 초기 싱글을 보내며 밴드가 고든의 작품을 매우 존경하고 "SST 레코드 음반의 프로덕션" (소닉 유스의 앨범 ''Sister'' 또는 ''EVOL'' 중 하나를 가리킴)을 높이 평가한다고 언급했다. 고든은 밴드의 싱글에 감명을 받아 검볼의 돈 플레밍의 도움을 받아 앨범 프로듀싱에 동의했다. 1991년 9월 7일, 버진 레코드 산하 인디 레이블인 캐롤라인 레코드에서 발매된 첫 정규 앨범 《Pretty on the Inside》는 "시끄럽고, 추하고, 의도적으로 충격적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16] ''Spin''의 "올해 최고의 앨범 20선" 목록에 선정되었다.[17] 또한 뉴욕의 ''빌리지 보이스''에서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었고, 영국 앨범 차트에서 59위에 올랐다.[18] 이 앨범은 싱글 "Teenage Whore"를 탄생시켰고, 이 싱글은 영국 인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19] 또한 밴드의 데뷔 뮤직비디오 "Garbadge Man"도 이 앨범에 수록되었다. 코트니 자신이 매춘부였던 경험 등을 적나라하게 노래한 이 앨범으로 유럽과 미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음악적, 가사적으로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는 거칠었고 펑크 록과 슬러지 메탈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노이즈와 피드백, 혼란스러운 기타 리프, 대조적인 템포, 충격적인 가사, 그리고 속삭임부터 격렬한 비명까지 다양한 러브의 보컬을 특징으로 했다.[20] 후년에 러브는 비평가들의 찬사와 궁극적인 컬트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을 "들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21] 밴드는 유럽 투어를 시작했으며, Mudhoney를 지원했다. 또한 1991년 7월부터 12월까지 미국에서 간헐적으로 투어를 진행하며 주로 하드록과 펑크 클럽, CBGB와 위스키 어 고 고에서 공연했고, 더 스매싱 펌킨스의 오프닝 무대를 맡기도 했다.[22]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밴드의 마지막 공연에 대한 기사에서 러브가 무대에서 릭커베커 기타의 헤드 스톡을 부쉈다고 언급했다.[22]
1991년 중반, 밴드는 메이저 레이블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마돈나와 음악 임원 프레디 드먼이 설립한 워너 뮤직 그룹의 자회사인 매버릭이 접근했지만 러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제가 코끼리를 타고 다니길 원할 겁니다. 그들은 제가 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저는 그저 시각적인 존재일 뿐입니다."[23] 또한 업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여성 아티스트 중 한 명과 밀접하게 관련된 레이블에서 스포트라이트를 공유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했다. 1992년 ''베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러브는 마돈나의 관심을 "흡혈귀가 최근 희생자에게 보이는 관심과 같은 것"이라고 묘사했다.[23] 이미 톱스타였던 커트와의 교제는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역설적으로 코트니와 홀 자체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2. 3. 메이저 데뷔와 상업적 성공 (1992-1999)
1992년, 홀의 코트니 러브와 에릭 어랜슨은 두 번째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러브는 니르바나의 프런트맨 커트 코베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며, 밴드의 음악을 더욱 멜로디컬하고 절제된 록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베이시스트 엠마리가 탈퇴하고, 드러머 캐롤라인 루도 팀을 떠났다.[24] 1992년 4월, 패티 셰멜이 드러머로 영입되었지만, 밴드는 베이시스트 없이 활동하며 곡 작업을 이어갔다.[21]
홀은 1992년 후반, 게펜의 자회사인 DGC와 8장의 앨범 계약을 체결했다.[24] 1993년 봄, 밴드는 잭 엔디노와 함께 싱글 “뷰티풀 선”을 발표했으며, 크리스틴 파프가 새 베이시스트로 영입되었다.[25][26] 그 해 여름, 밴드는 영국 투어를 진행하며 메이저 데뷔 앨범 ''라이브 스루 디스''의 곡들을 연주했다. 이 앨범은 1993년 10월에 녹음되었다.
''라이브 스루 디스''는 1994년 4월 12일 발매되었는데, 이는 러브의 남편 커트 코베인이 사망한 지 일주일 후였다. ''라이브 스루 디스''는 "돌 파츠", "바이올렛", "미스 월드" 등 여러 싱글을 배출하며 멀티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스핀'' 매거진으로부터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는 등 비평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27][28] ''NME''는 이 앨범을 "도시적 허무주의와 열정적인 어리석은 생각들의 개인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쓰래시 팝 오페라"라고 평했고,[29] ''롤링 스톤''은 "테이프에 담긴 여성 저항의 가장 강력한 폭발일지도 모른다"고 했다.[30] 코베인이 앨범 작곡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밴드는 이를 부인했다.[24]
1994년 6월, 베이시스트 크리스틴 파프가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31] 밴드는 멜리사 오프 더 뮤어를 새 베이시스트로 영입하고, 8월 26일 리딩 페스티벌에서 월드 투어를 시작했다.[32] 밴드는 1994년 후반부터 1995년까지 전 세계 투어를 진행하며, KROQ 올모스트 어쿠스틱 크리스마스,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빅 데이 아웃, ''MTV 언플러그드'', 리딩 페스티벌, 롤라팔루자 등 다양한 무대에 섰다.[33][34]
투어 중 러브의 무대 매너는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고, 1995년 롤라팔루자 페스티벌에서는 캐슬린 하나와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36] 같은 해, 드러머 패티 셰멜은 커밍아웃하며 레즈비언임을 밝혔다.[2] 투어가 끝날 무렵, 밴드는 첫 번째 EP ''애스크 포 잇''을 발표했다.[38] 1996년, 홀은 영화 《까마귀: 천사의 도시》 사운드트랙을 위해 "골드 더스트 우먼(Gold Dust Woman)"을 커버했다. 1997년에는 초기 녹음 세션을 담은 ''더 퍼스트 세션''과 초기 싱글, B면 곡 등을 담은 컴필레이션 앨범 ''마이 바디, 더 핸드 그레네이드''를 발매했다.[40][41]
1997년, 홀은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 《셀러브리티 스킨》 작업에 착수했다. 10개월에 걸쳐 녹음된 이 앨범은 파워 팝 요소를 통합한 새로운 사운드를 선보였으며,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이 앨범 작업에 참여했다.[42] 코건은 앨범 작곡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주장했지만, 밴드는 이를 부인했다.[43][44]
앨범 녹음 중, 프로듀서 마이클 바인혼의 압력으로 드러머 패티 셰멜이 세션 드러머로 교체되었고, 셰멜은 밴드를 탈퇴했다.[45][46] 이후 밴드는 사만다 말로니를 투어 드러머로 고용했다.[46]
《셀러브리티 스킨》은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타이틀곡 "셀러브리티 스킨(Celebrity Skin)", "말리부(Malibu)", "어풀(Awful)" 등 성공적인 싱글을 배출했다.[47][48]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9위에 올랐고, "셀러브리티 스킨"은 밴드의 유일한 1위 싱글이 되었다.[50]
2. 4. 활동 중단과 해체 (1999-2002)
1998년 겨울부터 1999년 겨울까지 홀은 《셀러브리티 스킨》(Celebrity Skin) 홍보를 위해 마릴린 맨슨과 함께 뷰티풀 몬스터 투어에 참여했다.[52] 그러나 대부분의 팬들이 맨슨의 팬이었고, 수익 배분 문제와 제작비 차이로 인해 홀은 9회 공연 후 투어에서 하차했다.[52] 맨슨과 러브는 무대에서 서로를 조롱했고, 러브는 맨슨의 공연 중 성경을 찢는 행위를 비판했다.[13] 포틀랜드의 로즈 가든 아레나 공연에서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않자, 홀은 공식적으로 투어에서 하차했다.[53]
투어에서 하차한 후에도 홀은 계속 공연을 하고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출연했다.[54] 1999년 6월 17일, 스웨덴의 훌츠프레드 페스티벌에서 홀의 공연 중 19세 여성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55] 홀은 1999년 7월 14일, 밴쿠버의 썬더버드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공연을 했다.[56]
1999년 10월, 오프 더 모어는 홀을 탈퇴하고 스매싱 펌킨스의 투어 베이시스트가 되었고,[57] 몇 달 후 사만다 멀로니도 탈퇴했다.[58] 밴드는 멤버를 충원하지 않고 사실상 활동 휴지 상태가 되었다. 홀의 마지막 발매작은 2000년 3월에 발매된 영화 《에니 기븐 선데이》의 싱글 "비 어 맨"이었다.[59]
밴드는 계약을 둘러싸고 유니버설 뮤직과 분쟁을 일으켰고, 이는 소송 문제로까지 번졌다. 코트니 러브는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과 니르바나의 권리 문제를 놓고도 충돌을 일으켰다.
2002년 5월, 코트니 러브와 에릭 얼랜드슨은 밴드 웹사이트에 해체를 공식 발표했다.[58][60] 해체 후, 얼랜드슨은 프로듀서 및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빈센트 갈로와 함께 RRIICCEE를 결성했다.[61] 러브는 솔로 활동을 시작하여 2004년 데뷔 앨범 《아메리카스 스윗하트》를 발매했다.[62] 멜리사 오프 더 모어 또한 솔로 활동을 시작하여 2004년 데뷔 앨범 《오프 더 모어》,[63] 2010년에는 두 번째 앨범 《아웃 오브 아워 마인즈》를 발매했다.[64]
2. 5. 재결성과 두 번째 해체 (2009-2016)
2009년 6월 17일, ''NME''는 코트니 러브가 기타리스트 미코 라킨과 함께 홀을 재결성하고 멜리사 오프 더 모어가 백업 보컬을 맡을 것이라고 보도했다.[66] 그러나 멜리사 오프 더 모어는 인터뷰에서 재결합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밝혔으며, 에릭 에를란드손은 ''스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러브 사이에 "계약"이 있어 자신의 참여 없이는 재결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68]
2010년 1월 1일, 홀은 새로운 웹사이트와 소셜 미디어 페이지를 개설했고, 2월에는 ''프라이데이 나이트 위드 조나단 로스''에 출연했다. 2010년 2월 17일, O2 셰퍼드 부시 엠파이어에서 리틀 피시의 지원을 받아 공연했다. 3월 16일, 10년 만의 첫 싱글 "Skinny Little Bitch"가 발매되어 빌보드 록 차트 29위, 얼터너티브 싱글 차트 21위에 올랐다.[69]
노바디스 도터''는 2010년 4월 26일 머큐리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어 평론가들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71] ''롤링 스톤''은 별 다섯 개 중 세 개를 주면서 러브의 보컬이 예전 같지 않지만 "적어도 그녀는 기억하고 있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라고 평했다.[72] 로버트 크리스토가우는 "A-"를 매기며 "새로운 펑크 분노가 필요"하며, 특히 45세 여성이 자신의 힘을 휘두르는 방법을 아는 것이 더 낫다고 언급했다.[74] 홀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북미, 유럽,[115] 러시아,[75] 브라질에서[76] 투어를 진행했다.
2011년 3월, 러브, 에를란드손, 패티 셰멜, 오프 더 모어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셰멜의 다큐멘터리 ''히트 소 하드: 패티 셰멜의 삶과 죽음 직전의 이야기'' 뉴욕 시사회에 13년 만에 함께 나타났다.[77] 셰멜은 함께 녹음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러브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78]
2011년 5월, "사만다"의 뮤직 비디오가 이스탄불에서 촬영되었으나 공식 발매되지는 않았다.[79] 2011년 9월, 스콧 립스가 스튜 피셔를 대신하여 드러머로 합류했다. 2012년 4월, 러브, 에를란드손, 오프 더 모어, 셰멜은 뉴욕 퍼블릭 어셈블리에서 ''히트 소 하드'' 다큐멘터리 애프터 파티에서 "미스 월드"와 와이퍼스의 "오버 더 에지"를 연주하며 1998년 이후 처음으로 함께 공연했다.[80][81]
2012년 12월 29일, 러브는 뉴욕에서 솔로 어쿠스틱 공연을 했고, 2013년 1월 선댄스 영화제에 출연했다.[82] 이후 라킨, 베이시스트 션 데일리, 립스를 백킹 밴드로 하여 솔로 활동을 이어갔다.[83]
2013년 12월 28일, 러브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에를란드손과 함께 찍은 사진을 게시하며 "2014년은 매우 흥미로운 해가 될 거예요"라고 언급했다.[84] 이는 에를란드손과의 화해와 2014년 재결합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85][86]
2014년 4월 2일, ''롤링 스톤''은 홀의 ''셀러브리티 스킨'' 시절 멤버들이 재결합했다고 보도했지만,[87] 러브는 곧 "결혼 이야기는 없다"라며 재결합이 불확실할 수 있음을 밝혔다.[88] 2014년 5월 1일, ''피치포크'' 인터뷰에서 러브는 ''노바디스 도터''를 홀의 앨범으로 발매한 것이 "실수"였다고 인정하며, 진정한 재결합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89][90][91]
2010년 재결합 당시, 원년 멤버는 코트니 러브뿐이었고, 에릭 에를란드손을 제외하면 모두 남성 멤버로 구성되었다. 에를란드손은 "나 없이 하는 홀의 재결합은 법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럼에도 홀은 2010년 4월 27일, 12년 만의 앨범 ''노바디스 도터''를 발매했다. 같은 해 여름 서머소닉을 통해 일본을 방문했다.
2. 6. 재결성 시도와 현재 (2019-현재)
2019년 10월, 홀은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서 리허설을 진행했다.[92] 그러나 이후 러브가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추가적인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93] 2020년 3월, 러브와 아우프 데르 마우르는 "Bans Off My Body" 행사에서 공연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취소되었다.[94]
3. 음악 스타일
3. 1. 작곡 방식
홀(Hole)은 초기에는 노 웨이브와 실험적인 밴드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리타드 걸(Retard Girl)과 같은 곡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95] 코트니 러브는 포스트 펑크 그룹 에코 앤 더 버니맨(Echo & the Bunnymen), 닐 영(Neil Young), 플릿우드 맥(Fleetwood Mac)과 같은 클래식 록의 영향을 받았다.[8][95] 밴드의 첫 앨범인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Pretty on the Inside)』는 불협화음적인 멜로디, 왜곡, 피드백을 사용한 펑크 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러브의 보컬은 속삭임부터 격렬한 비명까지 다양했다. 러브는 초기 작곡 방식을 "정말 미친 소닉 유스(Sonic Youth) 튜닝"에 기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96]
두 번째 앨범 『라이브 스루 디스(Live Through This)』는 덜 거친 사운드를 담았지만, 그룹의 펑크 기반을 유지했다.[99] 세 번째 앨범 『셀러브리티 스킨(Celebrity Skin)』은 하드 록 사운드에 파워 팝을 결합했으며,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 (band))의 영향을 받았다.[42] 2010년 앨범 『노바디스 도터(Nobody's Daughter)』는 어쿠스틱 기타와 부드러운 멜로디를 사용한 포크 록 지향적인 사운드를 선보였다.[100]
그룹의 코드 진행(chord progression)은 대체로 펑크 음악의 요소를 활용했다.[101] 러브는 이를 "그런지"라고 묘사했지만, 반드시 그런지는 아니었다. 비평가들은 그들의 노래 스타일을 "속임수처럼 가볍고 힘없는" 것과[101] "총소리 같은 기타 코러스"[30]의 결합으로 묘사했다.
3. 2. 가사
홀의 가사는 작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8] 코트니 러브의 가사는 신체 이미지, 강간, 아동 학대, 중독, 명성, 자살, 엘리티즘, 열등감 등 다양한 주제를 탐구했으며, 주로 여성과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다루어졌다.[103] 이러한 페미니즘은 대중과 비평가들이 러브를 라이엇 걸 운동과 잘못 연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103]
러브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망가진 이미지를 나란히 배치하려고 노력"했으며, "여성의 특정한 관점이 공간을 얻지 못했다"는 느낌을 표현했다.[104] 찰스 크로스는 ''Live Through This'' 앨범 가사를 "그녀의 일기의 진정한 연장선"이라고 언급했다.[24]
홀의 가사는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Live Through This''의 제목과 "Asking for It" 트랙의 가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에서 따왔다.[105] 싱글 "Celebrity Skin"에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106]과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시 ''A Superscription''의 인용구가 들어 있다.
3. 3. 라이브 공연
1990년대 내내 홀은 잦은 장비 파손, 기타 파괴를 동반한 예측 불가능한 무대 행동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108][22] 코트니 러브는 노래 중간에 횡설수설하거나 팬들을 무대 위로 불러들였고, 스테이지 다이빙을 하다가 옷이 찢어지거나 부상을 입기도 했다.[109] 뉴욕(잡지) 기사에서 존 호만스는 러브의 스테이지 다이빙을 "록 음악계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무섭고, 매혹적인 이미지"라고 묘사하며, 이를 강간에 비유하기도 했다.[110]
베루카 솔트의 니나 고든은 러브의 무대 행동에 대해 "그녀는 그냥 흥분해서 [나머지 밴드 멤버들은]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고 회상했다.[21] 러브는 당시의 행동이 심각한 약물 남용 때문이었다고 인정하며, "나는 마약에 완전히 취해 있었고, 그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21] 또한 자신의 무대 의상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베이비 돌"(1956)의 캐롤 베이커의 의상에서 영향을 받은 "킨더후어(kinderwhore)" 스타일은 베이비돌 드레스, 슬립과 잠옷, 번진 화장으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했다.[112] 커트 로더는 그녀의 무대 의상을 "방탕한 헝겊 인형"에 비유했고,[113] 존 필은 1994년 밴드의 리딩 페스티벌 공연에서 러브가 "얼굴, 손, 그리고 등에도 립스틱이 번진 채로 격렬하게 흔들렸다"고 묘사했다.[32]
밴드의 라이브 공연 세트 리스트는 즉흥 연주와 미발매곡의 거친 연주를 특징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8년까지 공연은 덜 공격적이고 더 절제되었지만, 러브는 계속해서 팬들을 무대 위로 불러들이고 노래를 부르면서 관객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54]
4. 구성원
홀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 '''코트니 러브(Courtney Love)''' – 리드 보컬, 리듬 기타 (1989–2002, 2010–2012)
- '''에릭 얼랜드슨(Eric Erlandson)''' – 리드 기타 (1989–2002, 2012)
- 마이크 가이스브레히트(Mike Geisbrecht) – 리듬 기타 (1989–1990)
- 리사 로버츠(Lisa Roberts) – 베이스 (1989–1990)
- 캐롤라인 루(Caroline Rue) – 드럼 (1989–1992)
- 질 에머리(Jill Emery) – 베이스 (1990–1992)
- '''패티 셰멜(Patty Schemel)''' – 드럼 (1992–1998, 2012)
- 레슬리 하디(Leslie Hardy) – 베이스, 백킹 보컬 (1992–1993)
- '''크리스텐 파프(Kristen Pfaff)''' – 베이스, 백킹 보컬 (1993–1994; 1994년 사망)
- '''멜리사 오 더 몰(Melissa Auf der Maur)''' – 베이스, 백킹 보컬 (1994–1999, 2012)
- '''사만다 멀로니(Samantha Maloney)''' – 드럼 (1998–2000)
- 미코 라킨(Micko Larkin) – 리드 기타 (2010–2012)
- 션 데일리(Shawn Dailey) – 베이스 (2010–2012)
- 스튜 피셔(Stu Fisher) – 드럼 (2010–2011)
- 스콧 립스(Scott Lipps) – 드럼 (2011–2012)
'''활동 연표'''
홀은 1989년 결성 이후 여러 차례의 멤버 교체를 겪었다. 코트니 러브와 에릭 얼랜드슨은 밴드의 핵심 멤버로 대부분의 기간 동안 활동했다. 초기에는 마이크 가이스브레히트(리듬 기타), 리사 로버츠(베이스), 캐롤라인 루(드럼)가 참여했다. 이후 질 에머리(베이스), 패티 셰멜(드럼), 레슬리 하디(베이스), 크리스텐 파프(베이스) 등이 밴드를 거쳐갔다. 크리스텐 파프는 1994년 사망했다. 멜리사 오 더 몰(베이스)은 1994년부터 1999년까지, 그리고 2012년에 활동했다. 사만다 멀로니(드럼)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활동했다. 2010년 재결성 당시에는 미코 라킨(리드 기타), 션 데일리(베이스), 스튜 피셔(드럼), 스콧 립스(드럼)가 합류했다.
5. 디스코그래피
홀은 4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1991년 9월 17일, 첫 정규 앨범 ''프리티 온 더 인사이드''를 발매했고, 1994년 4월 12일에는 ''라이브 스루 디스''를 발매했다. 1998년 9월 8일에는 ''셀레브리티 스킨''을, 2010년 4월 27일에는 ''노바디스 도터''를 발매했다. 또한, 1997년 10월 28일에는 컴필레이션 앨범 ''내 몸, 수류탄''을 발매했다. EP로는 1995년 9월 8일에 발매된 ''애스크 포 이트''와 1997년 8월 26일에 발매된 ''더 퍼스트 세션'', 그리고 1999년에 발매된 ''오풀''이 있다. 싱글로는 "Retard Girl", "Dicknail", "Teenage Whore", "Beautiful Son", "Miss World", "Doll Parts", "Violet", "Softer, Softest", "Celebrity Skin", "Malibu", "Awful", "Be a Man" 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홀 (밴드) 음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수상 및 후보 목록
시상식 | 연도 | 부문 | 후보작 | 결과 |
---|---|---|---|---|
그래미상[130] | 1999 | 최우수 록 음반 | 셀러브리티 스킨 (Celebrity Skin) | 후보 |
최우수 록송 | "셀러브리티 스킨 (Celebrity Skin)" | 후보 | ||
최우수 듀오/그룹 록 보컬 퍼포먼스[131] | 후보 | |||
2000 | "말리부 (Malibu)" | 후보 | ||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132][133] | 1995 | 최우수 얼터너티브 비디오 | "돌 파츠 (Doll Parts)" | 후보 |
1999 | 최우수 촬영 | "말리부 (Malibu)" | 후보 | |
NME 어워드[134] | 1999 | 최우수 밴드 | 홀 | 후보 |
최우수 음반 | 셀러브리티 스킨 (Celebrity Skin) | 후보 | ||
최우수 싱글 | "셀러브리티 스킨 (Celebrity Skin)" | 후보 | ||
스핀 독자 투표 어워드[135] | 1994 | 올해의 음반 | 라이브 스루 디스 (Live Through This) | 수상 |
7. 영향과 유산
홀은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여성 프런트 밴드 중 하나로, 1991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에서 300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했다.[115][116] 밴드는 코트니 러브의 파격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비평적 찬사를 받았으며, 특히 러브의 가사에 나타나는 페미니스트적 논평으로 주목받았다. 학자들은 이를 "제3기 페미니즘 의식을 명료하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했다.[117]
롤링 스톤은 코트니 러브와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결혼이 밴드에 미친 영향을 존 레넌과 오노 요코의 관계에 비교하며, "러브의 대결적인 무대 매너, 그리고 그녀의 가슴을 찢는 보컬과 강력한 펑크 팝 음악적 재능은 그녀를 독자적인 얼터너티브 록 스타로 만들었다"고 언급했다.[118]
이 밴드는 스카웃 니블렛,[119] 브로디 달레(디스틸러스와 스피너렛 출신),[120] 라나 델 레이,[121] 토브 로,[122] 티건 앤드 사라,[123] 애니 하디(자이언트 드래그 출신),[124] 빅토리아 레그랑드(비치 하우스 출신),[125] 그리고 영국의 록 밴드 나인 블랙 알프스[126] 등 여러 현대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인용된다. 이 밴드는 VH1의 "100 Greatest Hard Rock Artists" 목록에서 77위를 차지했다.[127]
8. 기타
8. 1. 2008년 유니버설 스튜디오 화재
2008년 유니버설 스튜디오 화재로 유니버설 뮤직 그룹 소유 건물들이 소실되었다.[129] 뉴스 보도에 따르면 홀을 포함한 많은 아티스트들의 녹음물이 화재로 유실되었다고 한다.[129] 러브와 밴드 멤버들은 유실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UMG를 고소한 아티스트 중 하나였으나, 2019년 8월 16일 "UMG 측의 홀의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는 파괴되지 않았다는 진술(확인 필요)에 근거하여" 해당 소송에서 제외되었다.[128][129] 밴드는 계약을 둘러싸고 유니버설 뮤직과 분쟁을 일으켜 소송 문제로까지 발전했다.[129] 밴드의 분쟁은 아티스트의 저작권 문제와 관련되어 언론에 보도되었고, 코트니는 별건으로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과 니르바나의 권리 문제를 놓고도 충돌을 일으켰다.[129]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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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N Media LLC
199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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